"가장 강하고, 가장 통합되어 있고, 가장 잔인할때, 그리고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미분류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 에서 칭기즈칸 본기의 끝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납니다. 




"차분하고, 웅대한 전략을 가졌으며, 군사를 일으키면 귀신과도 같아 40여개국을 멸망시켰고, 마침내 서하까지 평정하였다. 그의 위대한 공훈과 기이한 업적은 참으로 많았는데, 당시에 기록관이 없었기에 기록이 소실된 것이 많다."




몽골군의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하늘을 찔러, 그 군단의 일개 편린이 당도한 세계 방방공곡에서도 수 많은 대승리가 전설처럼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휩쓴 몽골, 그 몽골의 지배자 칭기즈칸에게 최대의 대적이자 유일무이의 강적이 단 하나 있다고 한다면, 바로 금(金) 나라였습니다.




1211년부터 펼쳐진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칭기즈칸과 그 수하들은 여러차례 금나라군을 격파했습니다. 하북의 군현 가운데 함락되지 않은 곳이 단 11개 성 밖에 남지 않았고, 이에 금나라는 수도를 연경에서 변경(卞京), 즉 개봉으로 옮겼습니다. 금은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며 100만에 가까운 인구 역시 남쪽으로 데려갔는데, 그 이후로는 하북과 산동 등의 남은 방위도 점차 유명무실 해지며 사실상 몽골은 황하 이북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세에 몰리면서도, 크고 광대한 북중국의 대국 금나라는 한번에 휩쓸려 멸망한 호라즘 왕조 등과는 다르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몽골과 금나라의 전쟁은 무려 23년간 펼쳐졌습니다. 중간에 칭기즈칸이 서쪽으로의 원정에 나설 무렵에는 장군 무칼리가 동방의 일을 거의 전담하여 맞서 싸웠으나 1223년 숨을 거두게 되자, 당시 인도 동북부 지역까지 원정 중이던 칭기즈칸은 다시 되돌아와 금나라와의 전쟁에 직접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1227년, 칭기즈칸 마저도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끝을 보지 못하고 천막 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원사에 기록된 칭기즈칸의 마지막 유언은 바로 금나라와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측근들에게 당부했습니다.




"금은 정예군을 동관(潼關)에 배치해두고 있고, 남으로는 산에 둘러쌓여 있으며, 북으로는 황하가 있으니 우리가 쳐부수기 매우 어려운 적이다. 다만 송나라에 길을 빌릴 수 있다면 필시 금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송은 금과 가히 철천지 원수, 반드시 우리에게 길을 빌려줄 것이다. 그러면 군사를 당주(唐州)와 등주(鄧州 : 두 곳 모두 하남성)으로 보내서, 변경을 바로 공격할 수 있다. 일이 그렇게 되면 금은 급하게 동관의 병력을 빼내올텐데, 군사와 말이 1천리를 달려와야 하니 설사 도착하게 되더라도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은 기력을 쥐어짜 겨우 말을 마친 칭기즈칸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칭기즈칸이 한 말대로, 당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길은(물론 사방에서 숭숭숭 뚫려서 오긴 하지만) 크게 보면 두 곳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황하 이북 지형에서 바로 황하를 건너 남하하는 부분이고, 둘째는 좀 더 서쪽으로 움직여 봉상(鳳祥), 보계(寶鷄) 방면에서 동진해 동관을 돌파하는 길이었습니다. 이미 황하 이북 지역은 유린 당한대로 유린당한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황하 이남을 막고 동관에 군사를 두어 몽골군을 막으려 했습니다.





 





동관 쪽을 노리는 몽골군의 서쪽 루트.









금나라의 완안진화상



칭기즈칸이 죽은 이듬 해인 1228년 3월, 새롭게 우구데이 칸을 맞이한 몽골군은 다시 한번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이때의 공격은 서쪽에서 대청원(大昌原)을 넘어 동관을 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몽골군의 이 시도는 상상조차 못했던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몽골군이 북방에서 산맥 사이로 넘어오려면 돌파해야하는 대창원(大昌原)에 이르렀을 무렵, 이를 막으러 나간 사령관 완안합달(完顏合達)은 누가 선봉으로 나서 저 막강한 몽골군에 맞서 싸울 것인지 묻자, 이에 완안진화상(完顏陳和尚)이라는 인물이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완안진화상은 본명은 '완안이' 인데, 모두들 그를 아명이었던 '진화상' 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본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일이 잘못 되어 감옥에 들어갔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형이 확실히 결정되지 못해서 18개월 동안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금나라 황제가 그를 꺼내주려고 했지만 함부로 죄인을 사면하면 안된다는 지적이 있어 석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완안진화상의 종형 완안사열이 병으로 죽자 금나라 황제 애종은 완안진화상을 불러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이 보고를 듣기로는 네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네 형이 죽어, 나는 국가의 명장을 한 명 잃게 되어 버렸다. 너의 형 때문에 짐은 너를 사면하겠으니, 천하에서는 필시 이를 옳지 않는 일이라고 책 잡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훗날 네가 분발해 공명을 세워 국가가 너의 큰 힘을 얻는다면, 비로소 천하는 짐이 망령되이 너를 사면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완안진화상은 황제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며 묵묵부답으로 절을 했는데, 감사의 말 한 마디 없이도 그 감격하고 슬퍼함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절절하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황제의 은혜로 기회를 받고 무시무시한 몽골군에 맞서 싸울 선봉으로 나서게 된 완안진화상은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곤 흡사 목석처럼 무뚝뚝하고 태연하게 나아가 군사를 지휘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8,000여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압도적으로 박살내는데 성공합니다. 금사에서는 이를 가르켜,




'대략 (몽고에 대항해)군사를 일으킨지 20년만에 이러한 승리가 있었다(蓋自軍興二十年始有此捷 ).. 단 하루 만에, (완안진화상의)명성이, 천하를 진동케 했다. (一日名動天下)'




고 언급했는데, 대청원의 승리야 말로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Battle of Parwan)에서 '잘랄 웃 딘' 에게 패배한 이후 제대로 된 완패 중에는 처음의 완패이자, 파르완 전투가 6만에 가까운 병력이 열세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족한 전력으로 월등한 몽골군을 격파한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몽골에 당해 하북 전지역을 내준 금나라로서는 말할 것도 없는 승리였습니다. 기록에서는 대창원의 승리를 들은 금나라의 병사들은 모두들,




'삼군의 병사들이, 모두 전투를 떠올리며, 껑충껑충 뛰며 기뻐하였다' (三軍之士踴躍思戰)




라고 하니, 당시 금나라의 병사들과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 승리가 통쾌한 승리였는지 알 법 합니다. 이에 금나라 황제 역시 친필로 완안진화상의 공을 칭찬하고, 정원대장군 직을 내려주었습니다.




이 당시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는 바로 충효군(忠孝軍)이였습니다.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 최강의 정예부대로,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 강족, 위구르 족, 그외 기타 거란 여진 등등까지 섞인 다민족 혼성부대로, 기본적으로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전력이 부족한 말기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습니다. 충효군을 이끈 사람이 완안진화상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충효군은 그 특성상 대단히 거칠고 사나워 전투력이 강해도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완안진화상은 사납기만하고 규율이라곤 없는 충효군을 이끌면서 일어서고 앉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전투할떄 비바람처럼 돌진하기를 모두 격식에 맞춰 완벽하게 해내며 무뢰배처럼 함부로 약탈하는것도 막으니, 군중에서는 완안진화상을 중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사천택





뜻하지 않은 대패를 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난 1229년 10월, 몽고군은 경양을 포위하고 다시 한번 대창원을 거쳐 진입하려는 준비를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약간 늦은 시기, 개봉 북쪽에서 금나라 장군 무선(武仙)이 지키는 위주(衛州) 방면으로 몽골에 협력하는 한인 가문 출신의 사천택을 보내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금나라 역시 장군 완안합달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위주를 돕게 하는 한편,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에게 군사를 맡겨 경양을 구원하게 했습니다. 약간의 시간차가 있지만, 양면전쟁이 된 셈입니다.




위주의 방면의 전투부터 먼저 보자면, 지원군으로 나아간 완안합달의 군사에는 완안진화상 역시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대규모 지원군이 오자 처음에는 사천택의 몽골군이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완안합달의 열전에는 '몽골군이 포위망을 풀었다' 고 하며 금나라 황제가 상을 내려준 기록이 있고, 완안진화상 열전에는 아예 '위주에서 승리했다' 고 까지 적혀 있는데, 초전에는 몽골군이 패전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듯 합니다. 이에 몽골군 주력은 북쪽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사천택이 이끄는 1천 부대만은 되려 적의 배후로 몰래 들어갔고, 그 뒤를 찔러 크게 혼란케 했는데, 이 무렵에 다른 몽골군이 협력해오는 바람에 큰 승리를 거두어 무선을 내쫓고 결국 위주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경양으로 나아간 이랄포아의 군대는 완안진화상이 승리를 거두었던 대창원에서 다시 한번 적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경양의 포위를 풀어버리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쪽 방면의 일이 끝나자 이랄포아는 위주 쪽으로 이동해서 완안합달과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승리하고 떠나기 전 바로 그 잠깐 사이에 이랄포아 이 양반이 사고를 치고 맙니다. 경양 방면에서 전투가 펼쳐질 무렵, 몽골 쪽에서는 사신 알골락(斡骨欒)을 보내 강화를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때는 한참 전투 와중이었기 때문에 알골락이 사신을 빙자하여 정탐을 할까 걱정스러웠던 이랄포아는 그를 잠시 억류해두었습니다. 문제는 경양의 포위가 풀린 뒤였습니다. 대창원의 승리와 경양성 구원으로 한껏 고무되어 자신만만하고 거만해진 이랄포아가 사신을 풀어주며 이죽거리면서 도발을 일삼았던 겁니다.



"우리는 군대와 병마가 넘쳐난다. 당장 오더라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으니, 오려먼 와 봐라!"









우구데이.




알골락이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자,  격분한 우구데이는 아우 툴루이와 더불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섬서성으로 출동했습니다. 설사 남아있었다 해도 대 칸이 직접 이끄는 부대를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이랄포아는 떠난 뒤였으니 몽골군은 대번에 대창원 부근을 뚫고 나와 장안 근처를 초토화 했고, 이윽고 군사를 이끌고 봉상(보계 방면)을 공격했습니다. 이 곳이 장악되면 동관 서쪽은 모두 몽골군의 놀이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이떄가 1231년이었습니다.




당시 완안합달과 이랄포아는 모두 동관에 머물고 있었지만, 몽골군의 기세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감히 나가서 봉상을 구원할 생각은 못 했습니다. 이에 금나라 황제가 나서서 봉상을 구원하라고 독촉했지만, 두 사람은 "적의 군사가 너무 강해서 함부로 나갈 수 없다." 고 대답했고, 이에 황제는 다시 한번 사람을 보내 "동관에서 나아가 봉상의 병력을 조금이라도 끌어내면, 봉상의 포위가 약화될 테니 그곳에서 더 버틸 수 있지 않겠느냐." 고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마지못해 군사를 이끌고 동관 서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위수 강가 북쪽에서 몽골군과 맞닥뜨린 두 사람은 그 날 저녁까지 적당히 교전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바로 동관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언 발에 오줌누기 같은 구원시도에 결국 봉상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동관 서쪽의 옛 진나라 지역은 모조리 몽골의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완안진화상은 예전부터 이랄포아의 이런 신중하지 못한 면을 탐탁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에서 "이랄포아는 대장군인 몸으로 약탈을 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니, 설사 오늘 포로 3백명 정도를 잡고 내일 소와 양 천마리 정도를 잡는다고 해도, 겨우 작은 이득을 취하면서 군졸들이 숨이 차서 헐떡거려 죽는것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수년 동안 애를 써서 기른 병마가 이 사람 때문에 한 번에 없어질 겁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이랄포아는 어느날 장수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술이 완안진화상에 이르자,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네가 일찍이 나의 장단점을 논하며, 국가의 병력이 나 때문에 괴멸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진실로 그런 적이 있느냐?"




이랄포아가 성을 냄에도 완안진화상은 내색 한번 없이 묵묵하게 자신의 술을 천천히 마신 후, 잔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 태연한 태도에 말문이 막힌 이랄포아도 차마 더 책망하진 못하고, "만약 나에게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는 내게 직접 말하라." 고 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수부타이





그런데 이때, 원사의 수부타이 열전을 보면 '동관을 공격하는데 종군했으나, 패배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사의 완안진화상 열전을 보면 '도회곡(倒回穀)에서 승리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만 보면 누구에게 이기고 졌다는 없는데, '금사' 의 이랄포아 열전을 보면 1231년 1월 수부타이가 동관을 공격했으나, 완안진화상의 충효군 1천여명이 지원을 오자 몽골군이 퇴각했고, 금나라 군이 곡구(谷口 : 골짜기 입구)까지 추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완안진화상이 수부타이를 이긴 것입니다. 이긴 것도 그냥 격퇴시켜 방어에 성공한 수준이 아니라,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동관에서부터 추격해서 골짜기 입구가 시작되는 곳까지 따라가며 아주 완패를 시켜버렸습니다. 이에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같은 기록에서는 '완안진화상이 수부타이를 물리쳤다.' 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별도로 동관 공략에 나선 수부타이가 패하긴 했으되 봉상 등이 함락되었으니 전체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만족하지 못한 우구데이는 수부타이를 심하게 질책했습니다. 이에 우구데이의 동생 툴루이가 나서 "병사를 일으키면 이길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 않겠나." 고 설득해서 수부타이는 난처한 지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선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굴욕이었을 겁니다.












툴루이




동관 서쪽을 휩쓴 몽골군은 낙양 등지에도 공격을 가해 피해를 입히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공격으로는 강하게 저항하는 금나라를 끝장내긴 무언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우구데이는 몽골의 여러 왕공을 모두 불러모아 대전략을 의논했습니다.



"금나라가 아직도 멸망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우리의 큰 적이다. 여러 군은 좋은 계책이 없는가?"




이에 툴루이가 나섰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하나 있기는 한데, 아직 여러 사람들이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우구데이는 주위를 물렸고, 툴루이는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일전에 봉상이 함락될 때 이창국이라는 투항자가 말하길, '금나라 황제가 개봉으로 천도해서,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황하와 동관 뿐입니다. 만약 보계를 통해 한중으로 들어가면, 한달도 되지 않아 당주, 등주에 이를 수 있습니다. 금나라 병사들이 이를 들으면 우리군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그 작전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우구데이는 "일찍이 태조(칭기즈칸)께서도 그런 작전을 남기셨다." 며 크게 기뻐하고는, 여기에 맞춰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마침내 금나라와 몽골간에 최후의 결정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몽골군의 주력은 크게 두개로 나뉘었습니다. 첫번째는 대칸 우구데이가 이끄는 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툴루이가 이끄는 우회군이었습니다. 툴루이 군은 이미 몽골군이 장악하다시피한 동관 서쪽 방면을 통해 한중으로 내려갔고, 이 과정에서 수십만명이나 되는 양민이 학살되었습니다. 마침내 몽골군이 금주를 지나 개봉으로 측면에서 달려오게 되자, 금나라 조정에서도 이를 막기 위한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신료들은 지구전을 주장했습니다. 몽골군이 먼 길을 오는동안 크게 지쳤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북군(몽골군)은 1만리나 되는 길을 험한 길을 지나왔고, 2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해서야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취해야할 계책으로는 여러 곳의 병력을 수도로 모으고, 양곡 수백만섬을 수도에 쌓아놓은 다음, 대장 한 명을 보내 낙양과 동관 등지를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남지방의 여러 성들은 청야작전을 펼치고, 만일 근처의 성채로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는 산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군은 먼 곳을 와서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가 없고, 우리가 상대해주지 않으니 크게 지칠 테니 군량이 떨어지면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금나라 애종





즉 다른 곳은 어떻게 되든 수도 방면만 방위하는데 집중하며 전투 자체를 회피하고 시간을 끌면 몽골군은 물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말을 들은 애종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크게 탄식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지 이제 20여년 째, 백성들은 농토와 주택을 폐허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처자식을 내다 팔며 군대를 양성했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군사가 20여만에 이르렀다. 그런데 적이 와도 맞아 싸우지 않고 단지 스스로 수비하려고만 한다면, 설사 그렇게 해서 도성을 보전할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런 것을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짐은 이에 대해 심사숙고 하였다. 국가의 보전하고 망하고는 단지 천명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짐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나의 백성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하지 않고는 단지 하늘이 정한 일일 뿐이고, 백성들이 몽골군의 칼날 아래 초토화 되고 있는데 그걸 내다버린채 그저 어떻게든 숨만 버티겠다고 숨어 있는것은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지난 20년간, 북방의 영토를 잃은 금나라가 힘겹게 기르고 모아온 최후의 군단이 툴루이를 막기 위해 나섰습니다. 완안합달, 이랄포아가 주요 대장이었고 여기에 양옥연, 무선, 완안진화상 등의 금나라 장군들이 모두 한곳에 집결했습니다. 동관 방면에는 아직 도단올전(徒單兀典)이 이끄는 명목상 11만, 기병 5천 병력이 주둔하고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금나라의 주력은 전부 이 싸움에 모인 것이었습니다.













한수 강을 앞에 두고 몽골군의 도하를 지켜보게 된 금군 수뇌부는 회의를 나눴습니다. 강화(光化)에서부터 강을 가로지르며 적이 도하를 아예 못하도록 하면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강을 건너게 내버려두고 그 뒤에 싸워야 하는가? 장혜(張惠) 등은 "강을 건너서 적의 도하 자체를 차단하며 싸워야 한다. 적이 도강하는 것을 내버려 두면 아군은 분명 곤경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몇번의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대번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대는 남쪽의 일만 알지 북방의 일은 모르면서 무엇을 안다고 말하는가? 강을 건너게 해서 적이 모래벌판에서 싸우게 함이 더 낫다. 대창원이나 위주에서의 전투 때처럼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대들은 함부로 나서지 마라!"




자신만만한 이랄포아와는 별개로, 불안했던 완안합달은 다른 의견을 좀 더 들어봤습니다. 군중에서는 도하를 막아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이랄포아의 고집을 꺾지 못했기에 결국 그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결국 적을 눈 앞에 두고도 금나라 군은 20여일 동안 손가락만 빨며 지켜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정찰병으로부터 "몽고군 1천명이 강을 건너고 있다." 는 보고를 받아 부리나케 출동해서보니, 모든 몽골군이 모두 도하에 막 성공한 참이었습니다. 금나라 군은 높은 곳에 진형을 구축하고 몽골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몽골군의 툴루이 부대는 4만 명이 채 못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물경 10만이 넘어가는 금나라 군과 정면대결을 하긴 여러모로 무모했습니다. 더군다나 교전이 펼쳐질때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에 금군이 무너질 뻔 할때마다 완안합달이 물러서는 장군을 죽이겠다며 싸움을 독려했기 때문에 쉽사리 금군이 무너지지도 않았습니다. 때문에 잠깐 물러나는 척 하며 적을 유인해보기도 했지만, 금군이 속아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펼쳐지자 툴루이는 이곳에서 금군과 악다구리를 해봐야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아예 적을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툴루이 군이 물러나고 있자, 일전에 도하작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장혜가 다시 한번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저들 군대가 3만 대군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부대가 3분의 1은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우리와 치열하게 싸우느라 2,3일 동안이나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을테니 그 퇴각하는 길을 공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다시 이랄포아가 이를 무시했습니다.




"강으로 퇴각하는 길은 진작이 끊어졌고, 황하의 얼음도 지금쯤이면 다 녹았다. 저들이 우리 지역에 이미 들어왔으니 어딜 무사히 돌아가겠느냐? 서두를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날, 몽골군은 귀신같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4, 5일 가량을 계속해서 주변 수색을 했지만 몽골군의 '몽' 자도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 진영을 세운 흔적이나 불을 피운 흔적도 없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탐문해봐도 적을 봤다는 사람이 없없습니다. 일단 나루터 부근에서 도하했다는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 강을 건너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러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이랄포아와 완안합달은 의논 끝에 일단 대군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등주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등주에 가는 도중 갑자기 소수의 몽골군이 튀어나와 군량을 약탈하는등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입성했는데, 이 무렵 몽골군이 나타나 3일 동안 등주를 공격하다가 또 다시 사라졌습니다. 




의도를 알기 어려운 몽골군의 움직임에 다시 한번 회의를 나눈 결과 장수들은 "몽골군은 우회해서 수도로 진격하고 있다." 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었습니다. 몽골군은 우회하여 근처의 당주를 함락시키고 개봉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등주 근처의 금나라 군은 모두 집결해서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 병력은 기병 2만, 보병 13만 총 15만에 이르는 대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몽골군은 여러갈래로 분산되어 기동력을 확보한 후 여기저기를 초토화 시키고 다녔기 때문에 금나라 병사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툴루이는 금나라 군이 오고 있는 것을 무시하고 달려가는게 아니라, 일부러 3천 정도의 기병을 시켜 끊음없이 금군의 주변에서 횡행하게 하면서 그들의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툴루이가 이때 "저들이 휴식할 수 없게 계속 밤에 북을 치고 떠들어서 시끄럽게 해라." 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금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점차 지쳐갔습니다.




이 전략은 수부타이가 툴루이에게 알려준 전략이었습니다. 싸움에 펼쳐지기전 툴루이가 적과 대결할떄 어찌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자, 수부타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에 사는 사람들은 노고를 잘 견뎌내지 못합니다. 자주 도발하고 그들을 고달프게 한다음 싸우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는 툴루이 군단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칸 우구데이가 이끄는 군대가 북방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당시 금나라의 모든 주력군은 툴루이를 막기 위해 나가있고, 그나마 남은 병력도 동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수도 부근에 있는 병력은 4만 명이 전부였습니다. 4만명은 사방 둘레 120리나 되는 개봉을 지키기엔 역부족인 숫자였습니다. 금나라 조정에서는 급한 대책으로 마근출(麻斤出)에게 시켜 민간인 1만명과 함께 황하의 제방을 터뜨려 물바다를 만드는 한편, 민간인이 몽골군에게 살육 당하지 않기 위해서 50만 구를 개봉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개봉성이라는 한 곳에 100만명이 훨씬 넘는 숫자가 한꺼번에 밀집되어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는 우구데이는 1만 기병을 더 보내 지원하는 동시에, 서둘러 합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툴루이 군은 총 5만 명에 육박하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수도가 위급한 이 때 15만 대군은 황급히 돌아오려 했지만, 계속해서 몽골군 유격대가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빨리 움직이기 힘들었습니다. 금나라 군은 적이 계속 괴롭혀대는 문제도 있고, 수천명에 불과한 병사에게 휘둘리며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군의 사기도 떨어질까 염려 되었기에 1만명을 보내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큰 의미는 없는 작은 승리에 불과했습니다.




금나라 군이 균주(鈞州)의 사하(沙河)라는 곳에 도착할 무렵, 그곳에 있던 몽골군은 금군이 오는 것을 보자 서둘러 떠났습니다. 이에 좀 안심하고 앉아서 식사를 하려고 하자, 몽골군은 다시금 돌아와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군사를 보내 맞서 싸우려 하자 몽골군은 싸워주지 않고 떠났습니다. 금군은 쉴수도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몽골군과 전투를 치루는 동시에 진군을 하며 마침내 균주성에서 25리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지만, 이 무렵 비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늘이 금나라를 버린듯한 갑작스런 폭설로 금군은 균주성 코앞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3일간이나 진영에서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금나라 황제의 성지(聖旨)를 가져왔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성지의 내용은 개봉이 위험하니 서둘러 군대는 귀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장수들은 모두 앉아서 성지를 받들다가, 성지 읽기가 끝나자마자 이랄포아는 벌떡 일어나 소매를 걷어붙혔고, 이에 등줄기가 싸해진 완안합달은 "일단 논의를 해보자." 고 했지만, 이랄포아는 "다 끝났다. 무슨 논의를 더 한단 말인가?"(止此而已,複何所議) 하고 아예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군대를 움직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금사에서는 아예 이 부분 뒤에,




'이미 넋이 나갔던 것이다.(蓋已奪魄矣)'





라면서, 이랄포아가 이성을 상실하고 미친 상태였다고 평을 남기고 있습니다. 금사는 원나라 사람들이 정리해서 작성한 기록이니, 이 평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랄포아의 적이었던 몽골인들이 그에게 내린 평이 됩니다.













바로 앞의 성에도 입성 못할 엄청난 폭설 속에서 금군은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몽골군은 요소요소마다 나무를 베어 길목을 막았고, 걷는것만도 힘든 금나라 군사들은 전투를 펼치면서 진군해야만 했습니다. 완안합달은 완안진화상을 선봉으로 내세워 겨우겨우 길을 확보하면서 이동했는데, 이렇게 해서 사투끝에 15리를 움직여 균주성 앞 10리 앞까지 도달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삼봉산(三峰山) 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눈과 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여기에 흰 안개까지 끼면서 군대의 이동은 아무리 억지를 써도 더 이상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눈은 3일 밤낮으로 쌓였고, 병사들이 눈밭을 지날라치면 진흙에 다리가 잡혀 움직일 수도 없었으며, 갑옷을 입은 상태로 눈속에 있으면 무기 끝에 서까래가 일 정도였습니다.




그 3일간 금나라 병사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지쳐갔습니다. 우구데이가 보낸 1만 병력과 합세한 툴루이 군은 이미 싸울 힘이 떨어진 금나라 군 주위에서 불을 피우고 포위하며 소와 양고기를 구워 먹으며 차례대로 포위하고 차례대로 쉬면서 전투력을 온존했는데, 대단히 영리하며 교활하게도 균주 방면으로의 길만은 열어 두었습니다. 지옥같은 사지에서 유일하게 길이 뚫려있자 균주 쪽으로 탈영하여 이동하는 병사들이 아주 많았는데, 몽골군은 일단 그것을 내버려 두다가 본진에서 확실히 멀어지면 부대를 파견해 그 뒤를 쳐서 제압했습니다. 제대로 된 교전 한번 치루지 못한 상태로 금나라 군은 무너져 내려갔습니다.




슬슬 금군 15만이 한계에 달한 것을 간파한 툴루이는 5만의 병력으로 공격을 가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병력 차이도 있고 하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우구데이 칸이 이끄는 본대가 오면 같이 힘을 합쳐 그때 치는게 낫지 않겠나 권했지만, 툴루이는 "결코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만일 시간을 끌다가 저들이 성에 입성이라도 하면 그때는 일이 힘들어진다." 며 공격을 감행했고,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금나라 병사는 문자 그대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무너지는 소리가 산과 같았다. 홀연히 하늘이 맑게 개어, 금나라 병사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 금사 이랄포야 열전


'대파하고, 수십리를 추격하니, 유혈은 길을 덮었고, 물자와 병장기가 쌓였으며, 금나라의 정예병은 이때 다 죽었다.' - 원사 툴루이 열전





금나라의 마지막 희망, 지난 20여년간 백성들의 논밭이 파괴되고 자식들을 내다 팔며, 제국민 전부의 꿈과 희망을 안고 사력을 다해 키운 정예 병력 15만은, 균주 삼봉산에서 제대로 된 전면전 한번, 죽음을 각오한 옥쇄전 한번 해보지 못한 채 굶주리고 손발이 얼어 동상으로 마비되고 기력이 다한채로 몽골군에게 처참하게 도륙되었습니다. 이것은 전투라기보단 차라리 살육에 가까웠습니다. 금나라 군사들은 적을 상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살육되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서로와 서로가 맞붙는 '전투' 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금나라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도주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늘이 금나라를 버린 것인지, 3일 밤낮으로 지독하게도 내렸던 눈보라는 이 무렵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췄습니다. 하늘에는 증오스러운 해가 무너지는 금나라를 저주하듯 높이 떠올랐고, 안개가 사라지며 주위의 풍경은 사방 수십리가 뻥 뚫린듯 시야가 확보되었습니다. 눈이 좋은 몽골군의 눈에 도망치는 금나라 병사들은 너무나도 잘 보였고, 수십리 동안 이어진 추격전에서 금군 장병들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개나 돼지처럼 죽어갔습니다.




죽어 나자빠진것은 병력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금나라가 자랑하던 명장들도 이 전투에서 거의 다 죽었습니다. 무선만이 겨우 도주에 성공했고, 양옥연, 번택, 장혜 등은 몰려드는 몽골군에 창을 들고 맞서 싸우다가 살해 되었습니다. 이랄포아는 개봉 방면으로 도주했지만 몽골군에게 사로잡혀 그대로 형틀에 묶였습니다. 몽골군은 그에게 항복할 것이냐고 물었지만, 수백번을 물어도 이랄포아는 "나는 금나라의 대신이다. 오로지 금나라 땅에서 죽을 것이다." 며 미친듯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에 몽골군은 그를 살해했습니다.




완안합달은 일이 이미 끝장난 것을 알고 말에서 내려 몽골군과 싸워 옥쇄하려고 했으나, 이랄포아가 옆에 보이지 않자 일단 남은 기병을 수습해 어떻게든 균주로 달아가 성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주력군이 깨진 마당에 성에 들어가봐야 이미 죽은 목숨을 약간 더 연장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균주를 지키려면 지원군이 필요했지만, 주력군이 전멸했으니 올 지원군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원이 온 것은 몽골군 쪽이었습니다. 마침내 우구데이가 이끄는 본대가 툴루이와 합류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금나라의 멸망은 확정되었습니다.




처참했던 전쟁터를 둘러본 우구데이는 툴루이를 칭찬하며 "그대가 없었으면 이러한 승리는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고 했고, 툴루이는 "이는 단지 하늘의 위엄이고, 군주의 복일 뿐이다." 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윽고 한 덩어리가 된 몽골군은 균주성 밑으로 땅굴을 파며 입성을 시도했고, 완안합달은 어떻게든 성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숫자에서 너무나 열세였기에 도주 시도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마침내 균주성이 함락되자, 성 안에서는 입성한 몽골군에 의해 처참한 대학살이 펼쳐졌습니다. 완안합달은 지하실에 숨이 있다가 몽골군 병사들에게 붙들려 잡혀 왔습니다.




몽골군 병사들은 그를 바로 죽이려 했으나, 완안합달은 자신을 죽여도 좋으니 마지막 부탁이 있다며 굴복하지 않고 버티면서, 몽골군의 대장인 수부타이가 어디에 있느냐, 단지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수부타이는 묘한 일이라고 여겨 완안합달을 만나 물었습니다.



"너는 이제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나를 보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수부타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완안합달은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남의 신하가 된 사람은 각자 자신의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법이지만, 경의 용맹함은 어느 장수보다도 뛰어나니, 바로 하늘이 내린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을 어찌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내 이제 경을 보았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겠다." 





완안합달은 그 말을 마치고 몽골군에게 살해 당했습니다. 




균주로 몸을 피한 금나라 장수 중에는 완안진화상도 있었습니다. 처참한 대학살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완안진화상은 제대로 몸을 숨겨 몽골군을 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완안진화상은 도주하는 대신, 점차 시간이 지나 광적인 학살이 잠잠해지자 오히려 그때 자발적으로 몽골군 앞에 나서 소리쳤습니다.  



"나는 금나라의 대장이다. 너희의 대장을 만나려 한다."




몽골 기병들은 그를 붙들고 자기네들 대장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몽골의 대장이 그의 성명을 묻자 완안진화상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바로 충효군통령 완안진화상이다. 지난날 대창원 전투의 승리한 자가 나이고, 위주에서 승리한 자도 나이며, 도회곡의 전투에서 승전한 자도 나다. 혼전의 와중에 내가 죽었다면 사람들은 내가 국가를 저버렸다고 일컫었을 것이니, 오늘에 이르러 나의 죽음을 명백히 함에, 천하에 반드시 이 완안진화상을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 기백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몽골의 대장은 완안진화상을 겁을 주어 투항시키려고 칼로 정강이를 베어냈지만, 완안진화상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입술을 귀까지 벌려 찢으면서까지 겁박했지만 완안진화상은 피를 뿜으면서도 끝까지 소리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완안진화상이 죽게 되자, 몽골의 대장은 그가 의로운 자라고 여기면서 마유주를 땅에 뿌리며 제를 지냈습니다.




"훌륭한 사내여. 다른 날 다시 태어난다면, 나로 하여금 마땅히 그대를 얻게 해주게."




삼봉산의 패전으로 금나라는 주력군을 전부 상실했고, 이를 지휘할 장수들 역시 전부 상실했습니다. 아직 동관에 도달올전이 이끄는 11만 병력이 명목상으론 존재하긴 했으나, 금나라는 전쟁을 치를 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도달올전의 11만 병력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봉이 포위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도달올전은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이를 구원하려 했는데, 병력은 있어도 물자가 없어 군대의 깃발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어, 섬주의 염전에 있는 깃발들까지 이를 징발했고, 자국민을 약탈해서 재물을 충원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겨우겨우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도달올전에서 이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몽골군 대부분은 하남에 몰려와 있으니, 하북은 비어 있습니다. 상공께서 개봉을 바로 구원하는 대신 위주를 점령해 적의 의표를 찌르면, 후방인 하북에 우리군이 있다는 것을 안 적은 놀라 군사를 나누어 일부를 하북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면 도성의 포위가 느슨해질테니, 이를 이용해 도성에 입성하면 됩니다."




이른바 손빈의 '위위구조' 전략이었지만, 도달올전은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는데 군심을 흐리게 하고 군기를 누설한다면서 되려 화를 내고 그 사람을 처형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도달올전 군은 11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들의 부모와 자식들 밑 중원과 하북에서 전란을 피해 온 상인과 노인, 아이들에 병사들의 아내와 혹은 병사들이 억지로 데려온 여자들까지 섞여 난장판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행군의 주위에서 몽골군 수백명이 까마귀처럼 뒤를 따르며 옆구리를 찌르거나, 낙오자를 공격했습니다. 또다른 몽골군들은 도달올전의 군대가 지나갈 곳의 앞을 미리 들려 모든 물자를 약탈하거나 불태워서 그들이 먹을것이 없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길까지 좋지 않아 눈이 쌓여 얼어붙인 산길을 지나야 했는데, 그 눈이 녹으면서 쌓인 진흙이 정강이까지 차올랐습니다. 군사를 힘겹게 따르던 아녀자들은 결국 데리고 있던 노인과 아이들마저 길에 내버려두고 가야 했는데, 군중에서 비통한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지옥같은 행군은 2백리 동안 이어졌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지쳤고 싸울 의지가 바닥이 났을때, 몽골군은 철령(鐵嶺) 어귀에서 이들을 포위하며 압박해왔습니다. 도달올전 군은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하지 않고 병사들이 탈주를 거듭했고, 결국 도달올전 역시 기병 수십명과 함께 골짜기 사이로 달아났다가 몽골군에게 잡혀 살해되었습니다.









개봉





이제 마침내 수부타이가 이끄는 군단에 의해 개봉이 포위되었습니다. 당시 개봉에서는 완안합달의 사망을 모르고 있었는데, 몽골군은 "너희가 믿는 것은 오직 완안합달과 황하 뿐이었는데, 이제 합달은 살해되었고 황하는 우리의 소유가 되었는데 무엇을 믿고 의지하려 하느냐?" 고 조롱했습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던 금나라에서는 화의를 요청하려 했지만, 현장의 수부타이는 "난 단지 개봉을 함락시키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이다.며 이를 거부했고 우구데이 칸은 더위를 피해 북방으로 돌아갔기에, 협상은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때 몽골군은 대군을 동원해 개봉성 주변의 참호를 순식간에 메꾸었지만, 강화에 뜻이 있었던 금나라 장수들은 함부로 몽골군을 자극할 수 없어 못해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몽골군이 시시각각 다가옴에도 전혀 공격을 할 수 없자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할 무렵, 열명이 채 되지 못하는 기병대에 호위를 받는 한 사람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금나라 황제, 애종이었습니다. 매우 비대한 체격이었던 애종은 수레에 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황제의 방문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고, 어떤 사람들은 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비가 추적추적 내려 길바닥은 모두 진흙뻘이 되어 있었는데, 애종은 무릎을 꿇는 사람들을 보고 손을 내저었습니다.




"짐에게 절을 올리지 말라! 진흙에 그대들의 옷이 더러워질까 걱정된다."




애종은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해산해 집으로 되돌아가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화가 났던 일이 풀리지 않은 일도 있고, 황제의 행차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 노약자부터 어린이까지 몰려들어 길을 막고 비키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사람들이 밀려들었는지, 어떤 사람들은 황제의 옷을 실수로 밞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종은 그런 사람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대신들고 수행원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애종에게 비를 피하려며 삿갓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애종은 이를 받지 않았습니다.




"군사들이 모두 야영생활을 하며 비와 이슬을 맞고 있다. 어찌 짐이 혼자 이것을 쓰고 있으랴?"




그렇게 말한 애종은 지나는 길마다 있는 병사들을 일일히 위로했고, 이에 병졸들은 만세를 부르며 "싸우다 죽는다 할지라도 여한이 없다." 고 소리쳤고, 어떤 병사들은 눈물까지 줄줄 흘렸습니다. 이때 일부 병사들이 황제 앞으로 나가 '화의를 원한다며 적이 눈 앞에 있어도 화살촉 하나 쏘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이 말 되는지' 물었습니다. 애종은 그런 병사들을 달래며 대답했습니다.




"짐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몽고의 군주에게 짐을 '신' 이라고 칭하고, 공물을 바치는 등 그들의 모든 요구를 수행했다. 다만 한 가지 한스러운 것은 자식이 장성하지 못했는데도 적에게 인질로 보내는 것이다. 너희들은 조금만 참거라. 짐의 아들 조왕이 인질로서 몽고에 갔는데도 적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공격해도 좋다."




"일이 이렇게 되어 사태가 급박해졌는데, 화의를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애종은 병사들에게 몽골군이 다가오면 공격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날 조왕은 인질로 떠나 몽골군에게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아 전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몽골군은 자신들이 먼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은 금나라 백성을 앞에 내세워 화살받이로 쓰면서 참호를 메꾸게 했습니다. 성 밖에서는 울부짖으며 제발 쏘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섶과 짚을 가져와 참호로 다가가다가 동족의 화살에 맞고 쓰러졌고, 성 안에서는 제발 오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동족에게 화살을 쏘았습니다. 지옥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참호가 전부 메꿔지자, 몽골군의 맹공이 펼쳐졌습니다.















금군은 몰려드는 몽골군을 상대로 진천뢰(震天雷)와 비화창(飛火槍)이라는 화약 무기를 사용해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16일간 펼쳐진 전투에서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이에 수부타이는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잠시 군대를 물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주 잠깐의 재정비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몽골군이 물러난 동안 개봉에서는 어떻게든 양식 100만석을 확보하고 다음의 싸움 준비를 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둘 수 있는 양식은 고작 3만석에 불과했고, 피난민까지 100만명이 훨씬 넘게 들어와 있던 개봉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모두들 속수무책으로 굶어 죽어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유한 집안의 귀하고 어린 딸들도 거리에 나와 먹을 것을 구걸했습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성 내에서는 죽은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더 이상 바닥이 없을것처럼 파멸적인 상황에 놓였던 금나라 군에게, 모든 것을 끝장내는 재앙스러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송나라 장군 맹공





그 해 12월, 몽골은 "만약 일이 성공하면, 하남지방은 송나라에게 주겠다." 면서 남송에게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대신 조범(趙范)은 "이것은 금나라와 손 잡고 요나라를 쳤던 옛날의 일과 유사하다." 며 거절해야 한다고 했지만, 금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송나라 조정의 대세 의견에 따라 남송은 몽골과 손을 잡았습니다. 기실 바로 전대인 금나라 선종의 시대에, "서둘러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힘을 이용해 몽골에 싸우자." 는 황당한 전략으로 몽골에 침략을 받으면서도 송나라를 공격해(물론 작전은 실패) 자극시켰던 일도 결정타였습니다. 이에 따라 송나라의 명장 맹공이 이끄는 부대가 북상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금나라의 애종은 개봉의 식량이 바닥나고, 상황이 악화되자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해 개봉을 떠났습니다. 이 정보를 얻은 수부타이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애종이 떠난 개봉을 포위했습니다. 이미 식량이 모조리 바닥나고 주위에서 피난민들이 모일대로 모여 인구 밀도가 극한에 다다른 개봉은 문자 그대로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모두가 굶어 죽어갔고, 고관 대작의 어린 자식들마저도 먹을 것을 찾아 구걸했으며, 처자를 죽여 잡아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역병까지 더해졌습니다. 




汴京大疫,凡五十日,諸門出死者九十餘萬人,貧不能葬者不在是數。


변경에서 역병이 50일 동안 들어 여러 문에서 죽은 사람이 90만 명이었다. 가난해서 화장을 못한 사람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개봉에서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무려 90만 명. 심지어 이 숫자는 너무 가난해서 화장조차 되지 못하고 그대로 길거리에서 죽어나자빠진 사람들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은 수자입니다. 가히 역사에 유례가 없는 지옥도가 개봉성 내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개봉성에서 최립(崔立)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열어서 몽골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당초에 수부타이는 "개봉성이 오랫동안 버티며 우리 병사를 많이 상하게 했으니, 이들 전부를 죽여 없애야 한다." 고 우구데이에게 제안했지만, 야율초재(耶律楚材)가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과 뛰어난 재주를 지닌 장인들이 모두 성에 있는데, 이들 모두를 죽이면 힘들게 정복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고 만류했고, 이에 개봉성 내에 남아 있던 147만명이 몽골군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 말은, 당초에 개봉성 안에 있던 사람은 240만명 이상이었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수도 개봉이 몽골군에 함락되던 때, 애종은 주로 홀사호(忽斜虎)라고 불린 완안중덕(完顔仲德)의 도움에 힘입어 채주(菜州)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나라 곧 여기까지 몽골군이 쳐들어왔고, 이에 더해 맹공이 이끄는 송나라 군까지 합류했습니다.




몽골군은 송나라군이 보유한 많은 공성병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송군이 가져온 30만석의 군량 덕분에 먼 길을 추격해온 굶주림 마저 해결했습니다. 반면 채주성 내에서는 굶주림 때문에 죽은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병사들이 부족해 아녀자들까지 징발해 흙과 돌을 나르게 했을 정도입니다. 이에 애종은 직접 현장에 나아가 군사들의 손을 어루만지고 타이르면서 그들을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적군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몽골군은 근처의 '연강' 을, 송나라군은 근처의 '시담호' 의 물줄기를 모두 채주 쪽으로 향하게 하니, 안그래도 굶주린 상태였던 채주는 물난리까지 겪으며 인간세상의 지옥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직 홀사호가 이끄는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적을 막아내면서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었습니다. 




패망이 눈앞에 보일 무렵, 애종은 비통에 잠겨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왕자 10년, 태자10년, 황제 10년을 하며 짐은 큰 과오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제와서 죽는 것은 크게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단지 한 스러운 것은, 옛부터 이어진 우리 금나라의 100여년 역사가 어찌하여 짐의 대에 이르러 끊어지게 되었단 말인가? 옛날의 횡음무도하고 난폭한 군주가 나라를 망쳤다는 말은 들었지만, 짐의 경우는 무엇이란 말이냐? 짐이 어찌하여 그들과 더불어 똑같은 망국의 군주가 되었단 말이냐."




슬픔에 잠긴 애종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고, 망국의 임금은 죄수처럼 묶여 적의 궁정에 끌려가 치욕을 당하거나 혹은 황량한 계곡에 갇혀 지냈다고 한다. 짐은 그런 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경들은 보라. 짐의 뜻은 결정되었다."




애종은 자신이 쓰던 모든 남은 물건들을 아직까지 남은 금나라 장병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채주 성 내에서는 하루하루 사람들이 굶주리고 지쳐 죽어갔고, 하루하루 병사들이 몽골군을 향해 투항했습니다. 평민의 옷을 입고 마지막 탈출로가 있을까 적의 진영을 성곽에서 살펴본 애종은, 탈출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황실과 관청의 남은 말 200마리를 모두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습니다.




1234년, 황제 애종이 36세가 된 해의 1월. 그는 황족 완안승린(完顔承麟)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해습니다. 승린은 거절하며 이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애조은 그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짐이 경에게 제위를 넘기려는 것은 부득이하여 그러는 것이다. 짐은 체격이 비대하다. 말을 타기도 어렵지 않은가. 반면 경은 평소에 민첩하고 가진 기량이 탁월하니, 만약 이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면 선제들의 위대한 대업을 잇도록 하라."




이에 완안승린이 새롭게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문무백관들이 의례에 따라 축하를 마친 그 직후, 남쪽 성문으로 송나라군이  진입했고, 곧이어 동사남북 4방에서 천지가 무너지는듯한 소리와 함께  군사들이 몰려왔습니다. 치열한 시가전이 펼쳐질 무렵, 애종은 목을 매서 죽었습니다.




금나라의 홀사호는 마지막 남은 정예병 1천 명을 이끌고 끝까지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애종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제장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승하하셨는데, 내가 더 이상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적병 따위에게 죽을 수 없다. 나는 이대로 지하로 가서 우리의 황제를 끝까지 모시겠으니, 제군들은 남은 계책을 잘 세우도록 하라!"




말을 마친 그는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남은 병력 500명은 모두 말했습니다.




"상공께서도 충절을 지키셨다. 우리들이 충절을 지킬 수 없겠는가?"




결의의 맹세를 나눈 제국의 마지막 군단, 완안아골타로부터 이어진 금나라 100여년 역사의 최후의 정예군단은 눈 앞의 몽골과 송나라의 병사를 상대로 끝까지 싸우며 적을 베고, 베고, 또 베어냈습니다. 참지정사 발출로루실, 올림답호토, 총수 원지, 원수 왕산아와 홀석렬백수, 그리고 원수 오고론환단 등은 최후의 최후까지 몰려드는 적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며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싸운 끝에, 500명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사했습니다.




한편 적군의 맹렬한 공세에 밀려나있던 마지막 황제, 완안승린은 애종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 신하들을 이끌고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죽은 애종에게 '애종' 이라는 시호를 올렸습니다. 아직 제사도 지내지 못했지만 주위의 성읍은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근신들은 최대한 서둘러 애종의 시신이 적에게 욕보이지 않게 화장을 하고는, 남은 유골을 수습하여 여수 강 옆에 묻었습니다. 그 직후 몽골과 송나라 연합군이 당도하여, 말제(末帝) 완안승린도 난전 중에 적에게 베여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단 하루도 채우지 못한 제위기간이었습니다. 




이로서 완안 아골타의 시대로부터 119년을 이어진 대제국 금나라는, 완전한 멸망을 맞이했습니다.













역사상의 수 많은 정복자와 정복 왕국들 중에서 몽골 제국이 특별히 유명한 것은, 그들이 정복한 땅이 그 무엇보다도 넒고 상대하고 무찌른 적이 누구보다도 많기 때문입니다. 몽골군은 고려에서도 싸웠고, 일본에서도 싸웠고, 인도에서도 싸웠고, 러시아와 폴란드, 헝가리에서도 싸웠으며 이집트에서도 싸웠고 베트남에서도 전쟁을 펼쳤습니다. 이들 나라와 땅은 모두 몽골이 발흥했던 막북(漠北)에서 아주 먼 곳입니다.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서 싸웠기에, 몽골 제국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서, 몽골 제국이 그토록 먼 곳에서도 강하고 무시무시했다면,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는 얼마나 강력했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몽골 제국의 판도에서, 북중국의 금나라는 너무나도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또한, 몽골이 역사상에 존재했던 수 많은 강력했던 유목 왕조들의 전성기와 달랐던 것은 그들이 위업을 이루었던 최초의 군주, 칭기즈칸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사라지고도 영광이 쇠하지 않고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대 칸 우구데이가 사망했을 무렵 이미 바투와 구육의 분쟁이 있었고, 뭉케 칸이 사망하고 나서 몽골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습니다. 큰 집안이 후세로 내려올수록 분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칭기스칸과 그의 아들 우구데이의 시대에, 몽골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통합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또한, 몽골군의 전투에 대한 수많은 전설과 함께 내려오는 이야기의 한편에는, 그들이 지나간 곳에서 보여준 무차별적인 학살과 폭력, 잔혹성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범한 문명 세계의 인간으로는 버틸 수 없는 초원의 험하고 위험한 폭력의 세계에서 '예리하게 단련된 야만성' 은 수 많은 문헌에서 공포스럽게 묘사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 이것은 '제한적이었다' 라고 봐야 할 겁니다.




머나먼 곳으로 나아간 몽골군은 주로 도시와 도시 사이를 공격하며 약탈을 했지, '점' 이 아닌 '선' 으로서 그 땅을 지배하고 주기적인 학살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몇몇 도시를 제외하곤 그들이 공격한 먼 땅의 영역 역시 인구 밀도가 높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며 몽골군이 가지고 있는 '초원의 폭력성' 이라는 것도 문명 세계와 충분히 접하며 누그러져서, 금나라와의 첫 전쟁에서 60년이 지났을 무렵, 남송 멸망을 결정지은 바얀의 20만 대군 원정 당시에는 대칸 쿠빌라이가 직접 "그 땅은 나의 것일 될테니, 지나친 학살과 약탈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고 지시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북중국의 금나라 땅은 이와 다릅니다. 금나라의 인구숫자는 최대 4849만에 이르렀고, 남송을 제외하고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던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한없이 넒은 평야에 논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각 지역의 인구 밀도도 중앙 아시아 등에 비해 높았습니다. 이슬람권 기록에서 몽골군의 잔혹성을 생생하고 세세하게 적는 식으로 비난했다면, 중국 측의 기록에서는 그저 단 한 두문장으로 수십만이 죽었다고 여러차례 기록했을 뿐입니다.




금나라는 몽골이 가장 강하고, 가장 통합되어 있고, 가장 잔인할때,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맞상대했습니다. 압도적일 정도로 강한 적과 싸우며, 북중국 땅은 인간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지옥같은 땅이 되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은 몽골과 23년을 맞상대하며 버텼습니다.




서방 세계에 그 이름을 깊게 남긴 바투의 '장자원정군' 은 1235년의 쿠릴타이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금나라 멸망의 바로 다음 해로, 몽골은 금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야 중앙아시아를 넘은 서방 세계로 여력을 펼칠 상황이 되었습니다. 1237년, 몽골의 군대는 마침내 러시아에 당도하며, 서방의 도시에 공격을 퍼붓었습니다. 금나라가 멸망한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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