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명장 서역 도호 반초 한나라 때의 흥미있는 이야기




반초(班超)는 자는 중승(仲升)이라고 하고, 산시성 함양(셴양)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부풍 안릉(扶風安陵)출생이라고도 하는데, 안릉이 현재의 함양이라고 합니다. 출생 연도는 33~102이고 후한의 장수였죠. 이 장수의 전투와 모험은 당나라의 고선지 정도를 제외하면 중원의 어떤 장수와도 다른 이질적인 싸움이었습니다.

반초의 가문은 본래 학자의 가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인 반표는 유명한 학자였고 형제인 반고와 누이 반소는 한서를 쓴 인물들이었지요. 반초 역시 본래는 낙양의 도서관에서 사서 노릇을 하면서 학문 공부에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흉노의 공격에 변경의 백성들이 수난을 당한다는 말을 듯자 그 자리에서 붓을 꺾어버렸습니다.

"대장부가 되어 지략이 있다면 마땅히 부개자와 장건을 본받아 이역에서 공을 세워야지 어찌 벼루와 묵 속에만 파묻혀 있겠는가?"

그리고 곧바로 군대를 따라서 머나먼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비롯된것이 투필종용(投筆從戎) 이라는 고사였습니다. 떠나기 전, 그래도 마음이 캥겼는지 반초는 관상에 재주가 있는 사람을 불러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습니다.

"선생은 지금은 서생이시군요. 허나 앞으로는 만리 밖에서 후작으로 책봉될 것이외다."

"어찌 그렇소?"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뒷목을 가져 제비처럼 날고 범처럼 고기를 먹을 터이니 이는 바로 만리 밖에서 열후에 책봉되는 상이외다!"



흉노와 한은 두 나라가 생길 당시부터 극렬하게 대립하였는데, 후한 때에 가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흉노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서기 48년 흉노 남쪽의 8개 집단의 추장인 일축왕 비(比)는 당대의 선우였던 포노(蒲奴)에 반대하여 떨어져 나왔고, 한나라에 아들을 볼모로 바치며 협조를 부탁합니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이에 곡물 2만5천 곡, 소와 양 3만6천 마리를 제공하여 남흉노로 하여금 북흉노를 막게 했지요. 이이제이라는 거지요.


다음해인 49년에는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오환과 선비족을 선동해 북흉노에 타격을 주는등 흉노의 위세는 많이 사그라드는 상태였습니다. 이때 자신감이 생긴 한은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들을 완전히 자신들의 손에 넣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들,  즉 북쪽의 투르판, 카라샤르(焉耆 : 옌치), 쿠챠(龜玆 : 구자), 악수, 우치 투르판, 카쉬가르(喀什 : 객십)와 남쪽 롭 노르(Lop Nor) 부근의 누란(樓蘭), 호탄, 야르칸드(莎車 : 사차) 등은 중국과 인도, 이란, 그리고 더 넘어서는 지중해 세계 그리스 권의 문명 들 사이의 교역지로서 실크로드라는 거대한 길의 중간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는, 이 거대한 실크로도는 시리아의 로마령 수도 안티옥에서 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 길은 히에라폴리스로 이어지고, 다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 제국에 다다르면 에크바타나, 헤카톰필로스, 메르브라는 도시를 거쳐 박트라를 넘고 파미르 고원에 다다르면 그 부근에서 사람들이 비단을 교역하고, 다시 더 지나면 객십에 다다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구자와 옌치, 누란을 지나 옥문관을 지나는 북쪽 길과 사차, 호탄, 나야, 미란, 그리고 누란을 지나 결국 두 길 모두 돈황에 다다르게 됩니다.  간쑤성을 지나는 이 길은 최종적으로는 장안과 낙양에 이른다고 합니다.



흉노와 한은 모두 이 길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경병(耿秉)과 두고(竇固)라는 두 명의 장군이 73년부터 북흉노를 견제하였습니다. 바로 이 두고의 부장 중에 대리 사마였던 반초가 있었죠.


73년 두고는 반초에게 이오(伊吾)를 공격하게 했는데 포해(蒲海) 옆에서 북흉노의 호연왕(呼衍王)을 물리치고 "많은 야만인(중국식으로)을 베어" 두고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두고는 반초를 곽순등과 함께 룹 노르의 남서부에 있던 신선왕국에 사자로 보내었습니다. 이 작은 서역 왕국들을 흉노에게서 이탈하라고 설득하려는 것이었죠.

신선왕은 처음에는 이 한나라의 사자들을 잘 대접했으나, 어느날 부터 갑자기 태만해져서 그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아하게 여긴 반초가 상황을 알아보니, 흉노의 사절이 도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신선국이 완전히 흉노의 손에 들어갈 우려가 있었지요. 그는 당장 36명의 수하들을 불러놓고 의논을 하였습니다.

"흉노의 사자들을 기습해 없애야겠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결코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不入虎穴 不得虎子)."

"문관이 같이 와있습니다. 그에게 조언을 처하는게 맞지 않습니까?"

"그는 일개 보통의 문관일 뿐이다. 지금 그에게 우리의 계획을 말한다면 그는 누설할 것이다. 이미 대사는 결정 되었으니, 명예도 없이 죽는 것은 용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

달도 뜨지 않던 그날밤, 반초의 수하들은 흉노 사신들의 거주지를 급습해 불을 지르고, 난입해서 그들을 베었습니다. 흉노 사자들도 30~40명 가량의 위병들을 데리고 왔으나 워낙에 당황하여 대응하지 못했고,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신선왕의 면전에 들이대었습니다. 크게 두려워한 신선왕은 떨면서 귀순을 결심하고 아들을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었고, 이 소식은 두고의 보고에 의해 조정에 보고 되어 후한의 명제는 반초를 군중 사마로 정식 임명하게 됩니다.



당시 타림 분지 남부의 패권을 가진것은 호탄의 왕이던 광덕이라는 인물이었는데, 호탄의 최전성기에는 인구가 8만 5천여명 가량에 병사는 3만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광덕은 사차, 즉 야르칸드를 물리치고 13개의 왕국을 점령,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북쪽의 패권을 가진것은 쿠챠의 건이라는 인물이 흉노의 지원을 받아서 카쉬가르를 점령했습니다. 이러한 혼란손에 반초는 이 카쉬가리아 지방으로 파견을 나왔습니다. 그는 우선 호탄의 광덕을 만났습니다.


광덕은 단시 기세가 몹시 오른 상태로 우쭐하여 반초를 무시하며 오만한 태도를 취했는데, 반초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 자리에서 왕에게 자문을 하던 무당을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정신이 번쩍 든 광덕은 한나라에 복종을 하겠다고 하면서 그 증거로 흉노의 사신을 죽였습니다. 만약 일이 반대가 되었다면 반초가 죽었을 테죠. 여하튼 위험한 일이었는데 호탄의 일을 정리한 반초는 곧바로 카쉬가르, 즉 소륵으로 소수의 군대를 이끌어 공격했습니다. 쿠챠의 건은 자신의 친신이었던 두제(兜題)라는 사람을 왕으로 삼았는데, 소수의 군대에도 불구하고 반초는 뛰어난 지휘로 소륵군대를 물리치고 두제를 사로잡더니 충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삼아 소륵왕가를 부활시켰습니다. 건이 흉노와 손을 잡고 있는한, 건의 영향력이 미치는 사람이 소륵왕이 되는건 반초가 바라는것이 아니었죠.



그런데 한나라의 황제 명제가 75년, 서역에선 갑자기 반란이 일어나 카라샤르 왕이 중국의 서역도호였던 진목을 살해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번에 반초에게 한방을 먹은 쿠챠인들은 이 기회를 틈타 반초를 공격했는데,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반초는 자신이 세운 소륵의 충왕과 협동하면서 1년 가량을 버텼습니다.



헌데 새로 황제가 된 장제는 이러한 서역 투쟁을 벌이는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반란등에 질려버려 반초를 돌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별 수 없이 돌아가던 반초가 코탄(于蚊)을 지날 무렵 코탄 사람들은 반초의 말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말렸고, 이에 감동한 반초는 조정의 명령도 무시하고 다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반초가 떠나자 소륵은 너무나 당연한듯이 쿠챠에 항복한 상태였는데, 반초는 단숨에 이들을 물리치고 6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인뒤 카쉬가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78년이 되자 악수, 투르판을 공격해 탈환하였죠. 이 투르판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흉노군대 4000여명을 참수했고 3만 마리가 넘는 가축을 획득하였습니다. 기세에 놀란 흉노는 철수하였습니다.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게 된 반초는 조정에 상주를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이 장거리의 원정이야말로, 흉노가 한나라에 쳐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끼치는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득하면서 말입니다. 그는 서역의 36개국을 장악하는것이야말로 흉노의 오른쪽 팔을 자르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에 동의한 조정은 1000여명의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지원군을 얻은 반초는 여러 반란들을 전부 평정했습니다.



사실 반초의 싸움은 거의 한나라 본국과의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는데, 유배자나 명예를 얻기 위해 온 사람 정도를 제외하면 그는 대부분의 군사를 카쉬가르, 호탄, 소그디아나 등에서 징집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반초는 정보원을 이용해서 정보를 얻는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 어떤 한인들보다 이들의 생각을 잘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84년에 반초가 세운 충왕은 반초에 대항하여 그를 죽이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별 생각없이 걸려드는 듯 하던 반초는 오히려 그 자리에서 충왕을 베어버렸고 숨겨두었던 군사를 출격, 적들을 죽여버렸습니다


흉노는 계속된 패배로 이곳에 영향을 줄수 있는 여력이 없었고, 인도 쪽의 쿠샨 왕조는 거리가 멀어서 손을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끊기게 되자 많은 서역의 나라들은 항복했고 반초는 서역도호가 되어 마치 로마의 총독과도 같은 위치가 되어 이곳을 다스렸습니다. 중앙 아시아의 총독이었죠.


유일하게 정복되지 않은 카라샤르도 94년에 정복되었고, 반초는 저 멀리 대진이라 불리우는 거대한 나라에 대해 자신의 부장 감영을 파견했습니다. 감영은 그곳까지 이르르는 도중에 파르티아인들의 방해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하지만 보고는 있었습니다.  



 화제 제9년(97년), 반초는 그 부관인 감영을 대진으로 파견해, (감영은) 서역을 통해, 안식(파르티아)의 서쪽의 경계에 도달했고, “커다란 바다”(페르시아만)의 기슭에 도달했다. 판도는 수천 리를 지나는 영역에 이르러, 성벽으로 둘러싸여 400이 넘는 도시를 포함한다. 수십의 소국을 거느리고 있다. 도시의 외벽은 석조이고, 역사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 소나무와 실삼나무가 자라고 있다."


왕은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여 …… 이 나라 사람들은 장신으로 균형 잡힌 용모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중국인을 닮아, 이 나라가 대진(Da Qin, 커다란 진)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 대진 국이 바로 서방의 지배자, 로마였습니다. 가장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선택한다는것은,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삼고 제위를 물려준것을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멀고도 먼 두개의 대제국이 이런 식으로 접점을 하나 만든 것이었죠.


서역에도 쉬지도 않고 달려온 세월, 반초의 아들 반용은 아예 중원의 구경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문득 나이가 든 반초는 죽기 전에 고향을 보고 싶었고 돌아올것을 부탁합니다. 반초가 아니면 마땅히 관리할 사람도 없었기에 조정에선 몇년씩이나 머뭇거렸지만 반초의 누이인 반소가 간곡하게 부탁하자 결국 귀환은 이루어졌고, 고향 땅을 본 반초는 편안하게 죽었습니다.


반초가 죽고 난뒤에 서역은 강족의 공격, 남흉노의 반란등에 다시 어지러워 졌습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이 반초의 아들 반용이었습니다. 그는 신선 왕을 항복시키고, 쿠차와 악수의 왕들을 수중에 넣고 흉노 집단을 몰아낸 뒤 호연을 복속시켰습니다. 130년 마침내 카쉬가르의 왕자와 페르가나의 사절이 낙양에 도달해 당대의 황제인 순재에게 조공을 하였지요.


그 후로도 후한의 서역 경영은 몇십년간 더 이어졌습니다. 허나 이때 조정에선 막강한 간신 양기가 전횡을 부리고 있었고, 후한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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